*나가노 사투리는 경상도 사투리로 대체하였습니다 (글쓴이 부산새럼)
“누고!!!”
내 뒤에서 날카롭게 내 고막을 찔러오는 그 소리에, 나는 직감했다.
아, 이제 끝이구나.
*
“흠~ 역시 고향에 오면 공기부터가 다릅니다, 공기부터가!”
“에이준, 창문 조금만 열어. 찬바람 많이 맞으면 안 좋아”
“흥, 도쿄 깍쟁이가 뭘 알겠슴까. 이 나가노의 상쾌한 겨울 공기를 모르는 당신이 불쌍함다!”
슬슬 길거리에서 캐럴이 들리기 시작하는 12월 초.
도쿄에서 생활하고 있는 나와 에이준은 1년에 한 번. 내가 비시즌일 때마다 에이준의 본가가 있는 나가노로 내려가서 겨울을 지내곤 한다. 그래서 올해도 변함없이 아침 일찍 트렁크에 짐을 쑤셔 넣고 나가노로 향하는 중이다. 365일 활발한 에이준은 본가로 내려가면 편안히 놀 것이라는 주변의 예상과는 달리 할아버님의 겨울 농사일을 돕는다. 그 때문에 결혼 초기, 나는 나가노로 내려갔다 오면 매번 근육통을 앓았었다. 그때 에이준한테 약해빠진 도쿄 깍쟁이라고 놀림받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나가노에서 겨울을 보내지 않으면 이상하다고 느낄 정도가 되었으니 사람은 정말 적응의 동물이 맞나보다.
“카즈, 정말 혼자 할 수 있겠슴까? 저 아직은 움직여도 되는데”
“안돼, 병원에서 너 가만히 있으랬잖아”
“배 더 커지면 정말 움직이지 못 할거라구요!”
“그냥 집에서 어머님이랑 귤 까먹고 있어”
올해는 예년과 다른 점이 하나 생겼는데 바로 에이준이 임신했다는 것이다. 아직 18주라서 배가 많이 커지진 않았지만 안 그래도 활발한 애가 평소처럼 뛰놀다가 무리하면 큰일이라 제발 올해는 집에서 편히 있으라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해 놓은 상태였다. 더군다나 시즌 중에는 제대로 옆에 있어 주지 못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옆에 있으니 맘껏 뛰어놀겠다는 심산으로 움직이고 있어서 심장이 제대로 남아나질 않는 매일매일을 보내고 있다.
“언제 도착해요?”
“좀 더 가야 하는데. 왜? 배고파?”
“입이 좀 심심하네요”
“거기 지퍼 열어봐 그럴 줄 알고 아침에 과일 좀 깎아왔어”
“역시 내 남편밖에 없슴다! 근데 과자는 없어요? 단 거 땡기는데”
“과자 말고 과일 먹어. 저번 주에 신나게 먹었잖아. 당분간 금지”
“도쿄 깍쟁이 진짜! 카즈가 나한테 제일 잔소리 많이 함다!”
그럼 내가 제일 많이 해야지 누구 잔소리 들으려고.
라고 했다간 도착하기도 전에 구레나룻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아서 혼자 속으로 삼켰다. 분명 인터넷이나 주변 경험자들의 조언은 임신하면 자연스럽게 조심스러워지고 여기저기 쉽게 아플 수 있다고 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에이준은 임신 전과 다름없이 활발하고 목소리 큰 말괄량이다. 조금 예민해지고 다혈질이 됐다는 것 말고는 성격에 큰 변화도 없다. 심지어 임신 전에도 잘 먹던 애였는데 임신하고부터는 무시무시한 먹덧이 찾아와서 정말 사람이 저렇게까지 먹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모든 음식을 마구 먹어 치우는 중이다.
“카즈도 한입 할래요?”
“아니... 에이준 많이 먹어”
“또 속 안 좋아요? 뚜껑 닫을까요?”
“과일은 냄새 그렇게 안 심하니까 괜찮아. 신경 쓰지 말고 먹어”
그리고 동시에 내가 입덧 중인, 그런 아이러니한 상황이 된 것이다.
본가 가서 음식 별로 못 먹을 것 같은데 어떡하지.
어머님이 또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놓으셨을까 봐 조금 겁먹은 상태로 점점 에이준의 본가에 다다르고 있었다.
“아이고!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
“어머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할아버님, 아버님도 건강하셨죠?”
“음”
이미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계시던 세 분을 보자마자 황급히 차 문을 열고 나가 인사를 올렸다. 여전히 두 분께는 미움 받는 처지인지 인사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 덕분에 조수석 문을 빨리 열어줄 수 있었지만.
“엄마! 아빠! 할아버지!”
“가시나 도쿄 보내놨어도 목소리 큰 건 안 고쳐지네”
“내가 뭐! 목소리 크면 좋지! 이래야 할아버지도 잘 들리잖아요!”
“자자,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 춥제, 이거라도 먼저 두르고 일단 안에 들어가자”
“엄마 나 배고파!”
“그래그래, 엄마가 니 좋아하는 걸로 많이 해놨다. 들어가자”
두꺼운 담요를 들고 오신 어머님이 에이준의 어깨에 담요를 둘러주고는 황급히 안으로 데려가셨다. 나는 트렁크에서 짐을 꺼내고 들어가겠다고 말씀드렸고 할아버님은 고개만 끄덕이시고는 안으로 들어가셨다. 트렁크에서 캐리어를 꺼내고 있는데 아버님이 슬쩍 오셔서는 내 손에 있던 캐리어를 가져가시길래 조금 어색하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선글라스를 벗은 얼굴을 거의 본 적 없는) 무뚝뚝한 아버님인데 오늘따라 왜 이러시는지 유난히 나에게 가까이 오시더니 조심스레 입을 여셨다.
“그... 우리 딸내미 어디 아프나?”
“...예?”
순간 너무 놀라서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춰버렸다.
“아니... 아 엄마가 안 그라더만 올해는 자네 좋아하는 거 말고 에이준 좋아하는 걸로 막 상을 차리대. 그러더니 아까 담요도 둘러주고. 뭔 일 있는기가?”
이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걸까.
왜지? 어머님은 아시는 걸 왜 아버님은 모르시지? 아버님이 모르시면 높은 확률로 할아버님도 모르실 것 같은데. 왜지? 어머님이 말씀 안 하셨나? 왜 말씀 안 하셨지? 에이준이 말 안 했나?
당황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아무 반응 없이 서 있자 아버님은 정말 큰 일이라도 난 건가 싶어서 나에게 더 목청을 높이시며 무슨 일 있냐고 되물으셨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일단 안에 들어가서 말씀드리겠다하고 안으로 모셨다. 뭐... 어차피 좀 있으면 다들 알게 되실 테니까.
*
“아~ 외투 너무 두껍고 무거웠어! 벗으니까 엄청 가볍잖아!”
“아무리 집안이래도 겨울이라 춥다. 어여 코타츠 안에 들어가라.”
“담요만으로도 충분해. 걱정 그만해 엄마!”
“어머님 말씀 들어”
대충 짐 정리를 끝내고 외투만 벗어 1층으로 내려오자 어머님과 에이준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확실히 외투를 벗으니까 이젠 티가 확 날 정도로 배가 불러있었다. 아까는 외투 때문에 눈치를 못 채셨나 보다.
“에이준, 할아버님이랑 아버님께 임신 소식 말씀 안 드렸어?”
“아 맞다!”
역시. 왜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 거지.
“얼른 말씀드려. 왜 어머님께만 말씀드린 거야?”
“내가 따로 서프라이즈로 말할 거라고 했었는데 그대로 까먹어버렸네요”
“뭣이 걱정이고. 지금 말하믄 되지.”
“맞아! 일단 밥부터 먹고!”
아이처럼 방방 뛰어 상에 앉은 에이준을 한번 바라보고는 어머님을 도와 음식을 날랐다. 마침 할아버님께서 들어오셔서 에이준을 한번 보시더니 배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오, 이제 눈치채셨나?
아무 말씀도 없이 가만히 바라보고 계시는 할아버님 뒤로 아버님이 따라 들어오시더니 할아버님께 왜 그러냐고 여쭙기 시작하셨다. 할아버님은 그 후로도 몇 초 동안 말씀이 없으시더니 모든 것을 꿰뚫어 볼 것 같은 눈을 하시고는 에이준을 불렀다.
“에이준, 니 살쪘나”
“응?”
부엌에서 미세하게 들리는 웃음소리에 결국 나도 참다 참다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두 분은 정말 부자지간이시구나.
“무슨 살이 배에만 붙노. 니 괘안나”
“할아버지! 오랜만에 본 손녀한테 살쪘다니!! 아니거든!!! 나 임신한 거거든!!”
“...뭣이?”
그 뒤 휘청이시는 할아버님을 똑바로 부축해드리지 않았다면, 밥도 먹기 전에 병원부터 갈 뻔했다. 할아버님이 조금 진정되신 후에는 이렇게 중요한 얘기를 왜 일찍 알려주지 않았냐는 성화를 듣느라 밥이 어디로 들어갔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운동하기도 바쁘담서 언제 또 아를 만들었노”
“하하 그러게요”
“홑몸도 아닌 아를 집에 혼자 두고 밖에서 공이나 치고 있었겠네”
“하하...”
“할아버지!!! 말을 해도 꼭!!”
어쨌든 결론만 말하자면 나는 더 미움받기 시작했다.
*
“손주사위”
“예 할아버님”
“온나, 딸기따러 가자”
“예”
코타츠 속에서 녹아내리고 있는 에이준의 입에 귤 한 알씩 넣어주던 중 할아버님의 부름에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쯤 잠들어서 귤을 받아먹던 에이준은 갑자기 눈을 부릅뜨더니 할아버님을 향해 살살 가르치라고 소리를 꽥 질러댔다. 곧바로 할아버님의 눈총을 받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미소를 띤 채 황급히 방을 나왔다. 친정살이는 몇 년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딸기 따는 거 다 까뭇제?”
“뭐... 조금은 기억납니다. 한 번만 가르쳐 주시면 될 것 같아요.”
“음”
에이준의 본가는 나가노에서 꽤 크게 농사를 짓고 있다. 딸기나 사과 같은 과일도 하시면서 밤도 따시고 하우스 농사도 하신다. 그래서 그런지 가지고 있는 땅도 많다고 들었다. 처음 나가노에 내려와서 에이준에게 농담 삼아 너희 집은 산도 가지고 있냐고 물었다가 아무렇지 않게 ‘여기부터 저기까지 우리 집 거다’ 라는 대답을 듣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할아버님이 도쿄에서 억대 연봉을 받는 프로 야구 선수를 ‘그냥 공놀이하는 놈’이라고 취급하셔도, 에이준이 가끔 도쿄 깍쟁이라고 놀려도 그저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여기서 나는 명함도 못 내미는 그냥 도시 촌놈이니까.
“오늘은 오느라 고생했으니 쪼매만 따고 가자”
“네 어디까지 하면 될까요?”
“니는 요 하우스 다 따라. 내는 옆에 거 따고 있을테니”
“네, 할아버님”
“무식하게 힘으로 쌔리 잡아땡기뿌믄 다 니 돈으로 메꿔야 할끼다”
“하하... 명심하겠습니다”
처음 딸기 재배를 하게 되었을 땐 좁은 통로에 비집고 앉아 몇 시간을 딸기 뽑는 것에만 집중했었는데 정말 고문이 따로 없었다. 앉아서 따기만 하는 게 뭐가 힘드냐고 할 수 있겠지만 딸기 값이 괜히 비싼 게 아니다. 에이준과 함께 재배할 때는 항상 재배하는 딸기보다 얻어먹는 잔소리양이 많아서 그냥 집에서 어머님과 감자 깎고 당근 써는 게 훨씬 행복했다. 모든 것은 요령이 있다며 무식하게 힘만 써서 애꿎은 딸기만 못 팔게 만든다고 등짝만 수십 대를 맞기도 했었다. 물론 그 딸기들은 다 내 사비로 사서 구단에 나눠주었다. 그렇게 구단에 딸기를 기부하던 일은 어느새 연례행사가 되어 도쿄에 돌아오면 그걸 또 어떻게 알고 딸기 갖고 왔냐고 여기저기서 연락을 해 왔었다. 물론 세월이 지나면서 요령이 생겨 망가뜨리는 딸기 수도 많이 줄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기부하는 딸기량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렇다. 그냥 매년 생돈 나가고 있는 것이다. (에이준은 옆에서 돈 쌓아 놨다 뭐 할 거냐고 할아버님 용돈 드리는 셈 치라고 했다)
*
“손주사위”
“네, 할아버님. 마침 다 끝냈습니다”
“음”
이제는 얼추 할아버님과 속도도 비슷해지고 검사받을 때도 그다지 겁이 나지 않는 수준까지 왔다. 매번 곁눈질로 보시는 것 같아도 미세하게 찌그러진 것조차 바로바로 골라내신다. 처음 딸기를 땄을 때는 할아버지가 볼 필요도 없다며, 에이준의 두 배로 받을 거라는 말과 함께 등에 빨간 손도장을 받았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처럼 곁눈질로 봐주시는 게 훨씬 나았다. 오늘은 평소보다 일을 덜 했는데도 씻고 저녁까지 먹고 나니 잠이 솔솔 왔다. 에이준은 오늘 운전도 하고 오느라 피곤했을 거라며 나를 데리고 일찍 방에 들어갔다.
“카즈, 많이 피곤함까?”
“아니야, 오늘은 딸기 하우스 하나밖에 안 했어”
“운전도 하고 온 데다 입덧 때문에 많이 먹지도 못하는데, 고생 많이 하네요”
“알아주셔서 고맙네요”
옆에 누워 내 앞머리를 만지며 조곤조곤 얘기하는 에이준에게 맞장구를 쳐주다 보니 나도 모르는 새 그렇게 잠이 들었다. 안 그런 것 같아도 피곤하긴 했나 보다.
*
“카즈, 카즈”
“으음...”
언제 잠들었는지, 꿈도 안 꾸고 자고 있었는데 옆에서 에이준이 내 어깨를 흔드는 것을 느끼고 부스스 눈을 떴다. 에이준이 임신하고 나서부터 잠귀가 밝아진 탓에 옆에서 조금만 부스럭거려도 눈이 떠졌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아니, 그게 아니고...”
이불을 더듬거리다 에이준의 배를 찾아 살살 쓰다듬으며 낮게 웅얼거리자 에이준은 곤란하다는 듯 쉽게 입을 열지 못하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갑자기 딸기가 땡김다”
“...딸기?”
가끔 이렇게 새벽에도 뭐가 먹고 싶다며 자다가도 일어나는 경우가 있었기에 그리 놀라진 않았다. 문제는 딸기가 없다는 것이다. 오늘 딴 것은 상품용이니 재고 보관 쪽으로 갔을 거고, 할아버님이 에이준용으로 따오신 것은 저녁 디저트로 다 먹었다. 그러니 지금 바로 에이준에게 줄 수 있는 딸기는 없다.
“딸기 저녁에 다 먹었을 텐데”
“응... 아는데 갑자기 먹고 싶어져서...”
“지금 몇 시지?”
“4시 조금 넘었슴다”
“...지금 안 먹으면 안 되겠어?”
“응”
불빛 하나 들지 않는 새벽인데도 호박색 두 눈은 번쩍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빛나고 있다. 보이지 않지만 보인다. 이해 못 하겠지만 그렇다.
“그래서 말인데, 지금 따 와 줄 수 있슴까?”
“뭐?”
에이준의 엉뚱한 발상이 웬일로 어제 잠잠하다 했더니 오늘을 위해 묵혀둔 것이었나 보다.
“지금 이 어두운 새벽에?”
“핸드폰 불빛 비추면 되잖슴까. 후딱 가서 몇 개만 따다 줘요”
“허...”
나의 불안한 예감을 읽은 건지 에이준은 내가 뭐라 말하기 전에 바로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한테는 아침에 제가 바로 말하겠슴다. 걱정하지 마십쇼. 혼나도 내가 혼남다”
아니, 그건 그거대로 문제니까 몸이 안 움직이지. 애초에 너만 혼날 확률보다 나만 혼나거나 내가 더 혼날 확률이 높고, 딸기는 할아버님의 중요한 생계수단 중 하나이ㄱ...
“애가 먹고 싶다잖아요...”
*
그래, 내가 무슨 힘이 있겠어.
아내와 애가 먹고 싶다 하면 아내 집안 제일 큰 어르신의 딸기 하우스도 서리하고 그러는 거지. 국가대표로 올림픽도 갔다 온 프로야구 리그 1위 팀 안방마님 타이틀 따위 이 나가노 땅에서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것쯤 이미 뼈저리게 잘 알고 있다. 나는 그저 이 새벽에 핸드폰에서 나오는 한줄기 불빛에만 의존한 채 작은 플라스틱 소쿠리를 옆구리에 끼고 딸기 도둑질을 하러 온 간 큰 놈일 뿐이다.
“한 개만 따도 바로 아실 것 같은데...”
불안한 마음은 속으로만 삼킨 채, 나는 오늘 딴 하우스의 옆 하우스로 슬금슬금 들어갔다. 보통 오늘 작업한 하우스의 옆 하우스는 다음날 작업할 것이라 미리 잠금장치를 풀어두시기 때문이다. 슬픈 예감은 언제나 맞더라니, 하우스는 너무도 쉽게 날 맞아주었다. 이렇게까지 하우스가 닫혀있길 바라본 건 인생을 살며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부디 늦게 알아채시길 바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하우스 가장 깊숙이 들어가서는 조심히 쪼그려 앉아 딸기를 따기 시작했다. 한 곳만 파기보다는 이곳저곳 듬성듬성 따는 나름 치밀한 계획도 세웠지만, 솔직히 다 헛짓거리일 것 안다. 그럼에도 안 하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하니까 하는 수밖에. 해가 뜨기 전 가장 어두운 시간에 벌레 소리 하나 없는 적막 속이라 딸기 따는 소리는 더욱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정의롭게 사는 인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법과 도덕을 무시하는 인간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지금 하는 이 범죄가 너무나도 마음을 옥죄어오고 있었다. 5개 정도 땄을 때 그만할까 싶었는데 간에 기별도 안 간다며 등짝을 때릴 누구님의 얼굴이 떠올라 저린 다리를 펴다 다시 구부렸다. 잠이 덜 깨서 그랬는지 아니면 딸기 서리에 대한 죄책감만 신경 쓰느라 그랬는지 나는 너무나도 쉽게 내 범죄를 자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었다. 가로등도 많이 없는 이 시골 바닥 새벽 4시 반이라는 암흑 속에서 나의 핸드폰 불빛만이 아주 휘황찬란하게 밖을 비춰주고 있다는 것을. 아예 처음부터 나는 나의 범죄를 여기 보세요-하고 자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처음부터 혼날 운명이었던 것이다. 저 멀리서 나를 비춰주는 또 다른 빛을 느끼지 못하였으니 말이다. 쭈그리고 앉아 작은 소쿠리에 어느 정도 쌓인 딸기를 바라보며 슬슬 됐겠지 생각하고 있던 그때.
“누고!!!”
내 뒤에서 날카롭게 내 고막을 찔러오는 그 소리에, 나는 직감했다.
아, 이제 끝이구나. 이건 좀 순화한 거고 정말 그때 그 당시에 내가 속으로 외쳤던 말은 이거였다. 좆됐다.
욕을 안 하는 사람도 긴박해지면 욕이 나오는구나. 나는 별로 깨닫지 않아도 될 것을 깨닫게 되었다.
*
“아 할아버지!!! 내가 시킨 거라니까!!!”
“시끄릅다!!!! 시킨 놈이나 시킨다고 하는 놈이나!!!”
“아부지, 뱃속에 아가 묵고싶었다카네예... 그렇게 많이 딴 것도 아니고 한 번만 봐주이소...”
“묵고 싶으믄 묵고 싶다 말을 하믄 되제!!! 내가 니한테 도둑질캐라 가르치드나!!!!!”
“할아버지가 새벽에 순찰 돌 줄 알았으면 내가 할아버지한테 따 달라 켓겠지!!!”
“이노무 가시나가!!!!”
“아이고, 아버님 애 떨어져요..!”
아침 6시. 온 가족이 (강제) 기상하여 거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
죄지은 자는 말 없이 무릎 꿇고 앉아있을 뿐이고, 나를 제외한 모두가 일어서서 아침부터 마음껏 성량을 뽐내고 계신다. 잠을 충분히 못 자서일까,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는 간절함 때문일까. 너무나도 도쿄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여기서 말 한마디 얹어봐야 저분들의 목소리에 묻혀서 그냥 불똥 튄 거 받아먹기만 하는 신세가 될 것이고. 그저 내 옆에서 같이 처량하게 놓여있는 딸기 소쿠리에 눈길을 주며 조용히 쓴웃음을 지었다. 뭐가 어찌 됐든...
나의 올해 연봉은 딸기값으로 다 나갈 것이다.
'다이아몬드 에이스 > 짤막한 단편,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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