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노 사투리는 경상도 사투리로 대체하였습니다 (글쓴이 부산새럼)

 

 

 

 

 

 

누고!!!”

 

내 뒤에서 날카롭게 내 고막을 찔러오는 그 소리에, 나는 직감했다.

, 이제 끝이구나.

 

 

 

 

 

*

 

 

 

 

 

~ 역시 고향에 오면 공기부터가 다릅니다, 공기부터가!”

에이준, 창문 조금만 열어. 찬바람 많이 맞으면 안 좋아

, 도쿄 깍쟁이가 뭘 알겠슴까. 이 나가노의 상쾌한 겨울 공기를 모르는 당신이 불쌍함다!”

 

슬슬 길거리에서 캐럴이 들리기 시작하는 12월 초.

도쿄에서 생활하고 있는 나와 에이준은 1년에 한 번. 내가 비시즌일 때마다 에이준의 본가가 있는 나가노로 내려가서 겨울을 지내곤 한다. 그래서 올해도 변함없이 아침 일찍 트렁크에 짐을 쑤셔 넣고 나가노로 향하는 중이다. 365일 활발한 에이준은 본가로 내려가면 편안히 놀 것이라는 주변의 예상과는 달리 할아버님의 겨울 농사일을 돕는다. 그 때문에 결혼 초기, 나는 나가노로 내려갔다 오면 매번 근육통을 앓았었다. 그때 에이준한테 약해빠진 도쿄 깍쟁이라고 놀림받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나가노에서 겨울을 보내지 않으면 이상하다고 느낄 정도가 되었으니 사람은 정말 적응의 동물이 맞나보다.

 

카즈, 정말 혼자 할 수 있겠슴까? 저 아직은 움직여도 되는데

안돼, 병원에서 너 가만히 있으랬잖아

배 더 커지면 정말 움직이지 못 할거라구요!”

그냥 집에서 어머님이랑 귤 까먹고 있어

 

올해는 예년과 다른 점이 하나 생겼는데 바로 에이준이 임신했다는 것이다. 아직 18주라서 배가 많이 커지진 않았지만 안 그래도 활발한 애가 평소처럼 뛰놀다가 무리하면 큰일이라 제발 올해는 집에서 편히 있으라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해 놓은 상태였다. 더군다나 시즌 중에는 제대로 옆에 있어 주지 못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옆에 있으니 맘껏 뛰어놀겠다는 심산으로 움직이고 있어서 심장이 제대로 남아나질 않는 매일매일을 보내고 있다.

 

언제 도착해요?”

좀 더 가야 하는데. ? 배고파?”

입이 좀 심심하네요

거기 지퍼 열어봐 그럴 줄 알고 아침에 과일 좀 깎아왔어

역시 내 남편밖에 없슴다! 근데 과자는 없어요? 단 거 땡기는데

과자 말고 과일 먹어. 저번 주에 신나게 먹었잖아. 당분간 금지

도쿄 깍쟁이 진짜! 카즈가 나한테 제일 잔소리 많이 함다!”

 

그럼 내가 제일 많이 해야지 누구 잔소리 들으려고.

라고 했다간 도착하기도 전에 구레나룻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아서 혼자 속으로 삼켰다. 분명 인터넷이나 주변 경험자들의 조언은 임신하면 자연스럽게 조심스러워지고 여기저기 쉽게 아플 수 있다고 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에이준은 임신 전과 다름없이 활발하고 목소리 큰 말괄량이다. 조금 예민해지고 다혈질이 됐다는 것 말고는 성격에 큰 변화도 없다. 심지어 임신 전에도 잘 먹던 애였는데 임신하고부터는 무시무시한 먹덧이 찾아와서 정말 사람이 저렇게까지 먹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모든 음식을 마구 먹어 치우는 중이다.

 

카즈도 한입 할래요?”

아니... 에이준 많이 먹어

또 속 안 좋아요? 뚜껑 닫을까요?”

과일은 냄새 그렇게 안 심하니까 괜찮아. 신경 쓰지 말고 먹어

 

그리고 동시에 내가 입덧 중인, 그런 아이러니한 상황이 된 것이다.

본가 가서 음식 별로 못 먹을 것 같은데 어떡하지.

어머님이 또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놓으셨을까 봐 조금 겁먹은 상태로 점점 에이준의 본가에 다다르고 있었다.

 

아이고!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

어머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할아버님, 아버님도 건강하셨죠?”

 

이미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계시던 세 분을 보자마자 황급히 차 문을 열고 나가 인사를 올렸다. 여전히 두 분께는 미움 받는 처지인지 인사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 덕분에 조수석 문을 빨리 열어줄 수 있었지만.

 

엄마! 아빠! 할아버지!”

가시나 도쿄 보내놨어도 목소리 큰 건 안 고쳐지네

내가 뭐! 목소리 크면 좋지! 이래야 할아버지도 잘 들리잖아요!”

자자,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 춥제, 이거라도 먼저 두르고 일단 안에 들어가자

엄마 나 배고파!”

그래그래, 엄마가 니 좋아하는 걸로 많이 해놨다. 들어가자

 

두꺼운 담요를 들고 오신 어머님이 에이준의 어깨에 담요를 둘러주고는 황급히 안으로 데려가셨다. 나는 트렁크에서 짐을 꺼내고 들어가겠다고 말씀드렸고 할아버님은 고개만 끄덕이시고는 안으로 들어가셨다. 트렁크에서 캐리어를 꺼내고 있는데 아버님이 슬쩍 오셔서는 내 손에 있던 캐리어를 가져가시길래 조금 어색하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선글라스를 벗은 얼굴을 거의 본 적 없는) 무뚝뚝한 아버님인데 오늘따라 왜 이러시는지 유난히 나에게 가까이 오시더니 조심스레 입을 여셨다.

 

... 우리 딸내미 어디 아프나?”

“...?”

 

순간 너무 놀라서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춰버렸다.

 

아니... 아 엄마가 안 그라더만 올해는 자네 좋아하는 거 말고 에이준 좋아하는 걸로 막 상을 차리대. 그러더니 아까 담요도 둘러주고. 뭔 일 있는기가?”

 

이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걸까.

왜지? 어머님은 아시는 걸 왜 아버님은 모르시지? 아버님이 모르시면 높은 확률로 할아버님도 모르실 것 같은데. 왜지? 어머님이 말씀 안 하셨나? 왜 말씀 안 하셨지? 에이준이 말 안 했나?

 

당황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아무 반응 없이 서 있자 아버님은 정말 큰 일이라도 난 건가 싶어서 나에게 더 목청을 높이시며 무슨 일 있냐고 되물으셨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일단 안에 들어가서 말씀드리겠다하고 안으로 모셨다. ... 어차피 좀 있으면 다들 알게 되실 테니까.

 

 

*

 

 

~ 외투 너무 두껍고 무거웠어! 벗으니까 엄청 가볍잖아!”

아무리 집안이래도 겨울이라 춥다. 어여 코타츠 안에 들어가라.”

담요만으로도 충분해. 걱정 그만해 엄마!”

어머님 말씀 들어

 

대충 짐 정리를 끝내고 외투만 벗어 1층으로 내려오자 어머님과 에이준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확실히 외투를 벗으니까 이젠 티가 확 날 정도로 배가 불러있었다. 아까는 외투 때문에 눈치를 못 채셨나 보다.

 

에이준, 할아버님이랑 아버님께 임신 소식 말씀 안 드렸어?”

아 맞다!”

 

역시. 왜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 거지.

 

얼른 말씀드려. 왜 어머님께만 말씀드린 거야?”

내가 따로 서프라이즈로 말할 거라고 했었는데 그대로 까먹어버렸네요

뭣이 걱정이고. 지금 말하믄 되지.”

맞아! 일단 밥부터 먹고!”

 

아이처럼 방방 뛰어 상에 앉은 에이준을 한번 바라보고는 어머님을 도와 음식을 날랐다. 마침 할아버님께서 들어오셔서 에이준을 한번 보시더니 배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 이제 눈치채셨나?

아무 말씀도 없이 가만히 바라보고 계시는 할아버님 뒤로 아버님이 따라 들어오시더니 할아버님께 왜 그러냐고 여쭙기 시작하셨다. 할아버님은 그 후로도 몇 초 동안 말씀이 없으시더니 모든 것을 꿰뚫어 볼 것 같은 눈을 하시고는 에이준을 불렀다.

 

에이준, 니 살쪘나

?”

 

부엌에서 미세하게 들리는 웃음소리에 결국 나도 참다 참다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두 분은 정말 부자지간이시구나.

 

무슨 살이 배에만 붙노. 니 괘안나

할아버지! 오랜만에 본 손녀한테 살쪘다니!! 아니거든!!! 나 임신한 거거든!!”

“...뭣이?”

 

그 뒤 휘청이시는 할아버님을 똑바로 부축해드리지 않았다면, 밥도 먹기 전에 병원부터 갈 뻔했다. 할아버님이 조금 진정되신 후에는 이렇게 중요한 얘기를 왜 일찍 알려주지 않았냐는 성화를 듣느라 밥이 어디로 들어갔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운동하기도 바쁘담서 언제 또 아를 만들었노

하하 그러게요

홑몸도 아닌 아를 집에 혼자 두고 밖에서 공이나 치고 있었겠네

하하...”

할아버지!!! 말을 해도 꼭!!”

 

어쨌든 결론만 말하자면 나는 더 미움받기 시작했다.

 

 

 

*

 

 

 

손주사위

예 할아버님

온나, 딸기따러 가자

 

코타츠 속에서 녹아내리고 있는 에이준의 입에 귤 한 알씩 넣어주던 중 할아버님의 부름에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쯤 잠들어서 귤을 받아먹던 에이준은 갑자기 눈을 부릅뜨더니 할아버님을 향해 살살 가르치라고 소리를 꽥 질러댔다. 곧바로 할아버님의 눈총을 받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미소를 띤 채 황급히 방을 나왔다. 친정살이는 몇 년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딸기 따는 거 다 까뭇제?”

... 조금은 기억납니다. 한 번만 가르쳐 주시면 될 것 같아요.”

 

에이준의 본가는 나가노에서 꽤 크게 농사를 짓고 있다. 딸기나 사과 같은 과일도 하시면서 밤도 따시고 하우스 농사도 하신다. 그래서 그런지 가지고 있는 땅도 많다고 들었다. 처음 나가노에 내려와서 에이준에게 농담 삼아 너희 집은 산도 가지고 있냐고 물었다가 아무렇지 않게 여기부터 저기까지 우리 집 거다라는 대답을 듣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할아버님이 도쿄에서 억대 연봉을 받는 프로 야구 선수를 그냥 공놀이하는 놈이라고 취급하셔도, 에이준이 가끔 도쿄 깍쟁이라고 놀려도 그저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여기서 나는 명함도 못 내미는 그냥 도시 촌놈이니까.

 

오늘은 오느라 고생했으니 쪼매만 따고 가자

네 어디까지 하면 될까요?”

니는 요 하우스 다 따라. 내는 옆에 거 따고 있을테니

, 할아버님

무식하게 힘으로 쌔리 잡아땡기뿌믄 다 니 돈으로 메꿔야 할끼다

하하... 명심하겠습니다

 

처음 딸기 재배를 하게 되었을 땐 좁은 통로에 비집고 앉아 몇 시간을 딸기 뽑는 것에만 집중했었는데 정말 고문이 따로 없었다. 앉아서 따기만 하는 게 뭐가 힘드냐고 할 수 있겠지만 딸기 값이 괜히 비싼 게 아니다. 에이준과 함께 재배할 때는 항상 재배하는 딸기보다 얻어먹는 잔소리양이 많아서 그냥 집에서 어머님과 감자 깎고 당근 써는 게 훨씬 행복했다. 모든 것은 요령이 있다며 무식하게 힘만 써서 애꿎은 딸기만 못 팔게 만든다고 등짝만 수십 대를 맞기도 했었다. 물론 그 딸기들은 다 내 사비로 사서 구단에 나눠주었다. 그렇게 구단에 딸기를 기부하던 일은 어느새 연례행사가 되어 도쿄에 돌아오면 그걸 또 어떻게 알고 딸기 갖고 왔냐고 여기저기서 연락을 해 왔었다. 물론 세월이 지나면서 요령이 생겨 망가뜨리는 딸기 수도 많이 줄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기부하는 딸기량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렇다. 그냥 매년 생돈 나가고 있는 것이다. (에이준은 옆에서 돈 쌓아 놨다 뭐 할 거냐고 할아버님 용돈 드리는 셈 치라고 했다)

 

*

 

손주사위

, 할아버님. 마침 다 끝냈습니다

 

이제는 얼추 할아버님과 속도도 비슷해지고 검사받을 때도 그다지 겁이 나지 않는 수준까지 왔다. 매번 곁눈질로 보시는 것 같아도 미세하게 찌그러진 것조차 바로바로 골라내신다. 처음 딸기를 땄을 때는 할아버지가 볼 필요도 없다며, 에이준의 두 배로 받을 거라는 말과 함께 등에 빨간 손도장을 받았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처럼 곁눈질로 봐주시는 게 훨씬 나았다. 오늘은 평소보다 일을 덜 했는데도 씻고 저녁까지 먹고 나니 잠이 솔솔 왔다. 에이준은 오늘 운전도 하고 오느라 피곤했을 거라며 나를 데리고 일찍 방에 들어갔다.

 

카즈, 많이 피곤함까?”

아니야, 오늘은 딸기 하우스 하나밖에 안 했어

운전도 하고 온 데다 입덧 때문에 많이 먹지도 못하는데, 고생 많이 하네요

알아주셔서 고맙네요

 

옆에 누워 내 앞머리를 만지며 조곤조곤 얘기하는 에이준에게 맞장구를 쳐주다 보니 나도 모르는 새 그렇게 잠이 들었다. 안 그런 것 같아도 피곤하긴 했나 보다.

 

*

 

카즈, 카즈

으음...”

 

언제 잠들었는지, 꿈도 안 꾸고 자고 있었는데 옆에서 에이준이 내 어깨를 흔드는 것을 느끼고 부스스 눈을 떴다. 에이준이 임신하고 나서부터 잠귀가 밝아진 탓에 옆에서 조금만 부스럭거려도 눈이 떠졌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아니, 그게 아니고...”

 

이불을 더듬거리다 에이준의 배를 찾아 살살 쓰다듬으며 낮게 웅얼거리자 에이준은 곤란하다는 듯 쉽게 입을 열지 못하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갑자기 딸기가 땡김다

“...딸기?”

 

가끔 이렇게 새벽에도 뭐가 먹고 싶다며 자다가도 일어나는 경우가 있었기에 그리 놀라진 않았다. 문제는 딸기가 없다는 것이다. 오늘 딴 것은 상품용이니 재고 보관 쪽으로 갔을 거고, 할아버님이 에이준용으로 따오신 것은 저녁 디저트로 다 먹었다. 그러니 지금 바로 에이준에게 줄 수 있는 딸기는 없다.

 

딸기 저녁에 다 먹었을 텐데

... 아는데 갑자기 먹고 싶어져서...”

지금 몇 시지?”

“4시 조금 넘었슴다

“...지금 안 먹으면 안 되겠어?”

 

불빛 하나 들지 않는 새벽인데도 호박색 두 눈은 번쩍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빛나고 있다. 보이지 않지만 보인다. 이해 못 하겠지만 그렇다.

 

그래서 말인데, 지금 따 와 줄 수 있슴까?”

?”

 

에이준의 엉뚱한 발상이 웬일로 어제 잠잠하다 했더니 오늘을 위해 묵혀둔 것이었나 보다.

 

지금 이 어두운 새벽에?”

핸드폰 불빛 비추면 되잖슴까. 후딱 가서 몇 개만 따다 줘요

...”

 

나의 불안한 예감을 읽은 건지 에이준은 내가 뭐라 말하기 전에 바로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한테는 아침에 제가 바로 말하겠슴다. 걱정하지 마십쇼. 혼나도 내가 혼남다

 

아니, 그건 그거대로 문제니까 몸이 안 움직이지. 애초에 너만 혼날 확률보다 나만 혼나거나 내가 더 혼날 확률이 높고, 딸기는 할아버님의 중요한 생계수단 중 하나이ㄱ...

 

애가 먹고 싶다잖아요...”

 

 

 

*

 

 

 

그래, 내가 무슨 힘이 있겠어.

아내와 애가 먹고 싶다 하면 아내 집안 제일 큰 어르신의 딸기 하우스도 서리하고 그러는 거지. 국가대표로 올림픽도 갔다 온 프로야구 리그 1위 팀 안방마님 타이틀 따위 이 나가노 땅에서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것쯤 이미 뼈저리게 잘 알고 있다. 나는 그저 이 새벽에 핸드폰에서 나오는 한줄기 불빛에만 의존한 채 작은 플라스틱 소쿠리를 옆구리에 끼고 딸기 도둑질을 하러 온 간 큰 놈일 뿐이다.

 

한 개만 따도 바로 아실 것 같은데...”

 

불안한 마음은 속으로만 삼킨 채, 나는 오늘 딴 하우스의 옆 하우스로 슬금슬금 들어갔다. 보통 오늘 작업한 하우스의 옆 하우스는 다음날 작업할 것이라 미리 잠금장치를 풀어두시기 때문이다. 슬픈 예감은 언제나 맞더라니, 하우스는 너무도 쉽게 날 맞아주었다. 이렇게까지 하우스가 닫혀있길 바라본 건 인생을 살며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부디 늦게 알아채시길 바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하우스 가장 깊숙이 들어가서는 조심히 쪼그려 앉아 딸기를 따기 시작했다. 한 곳만 파기보다는 이곳저곳 듬성듬성 따는 나름 치밀한 계획도 세웠지만, 솔직히 다 헛짓거리일 것 안다. 그럼에도 안 하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하니까 하는 수밖에. 해가 뜨기 전 가장 어두운 시간에 벌레 소리 하나 없는 적막 속이라 딸기 따는 소리는 더욱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정의롭게 사는 인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법과 도덕을 무시하는 인간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지금 하는 이 범죄가 너무나도 마음을 옥죄어오고 있었다. 5개 정도 땄을 때 그만할까 싶었는데 간에 기별도 안 간다며 등짝을 때릴 누구님의 얼굴이 떠올라 저린 다리를 펴다 다시 구부렸다. 잠이 덜 깨서 그랬는지 아니면 딸기 서리에 대한 죄책감만 신경 쓰느라 그랬는지 나는 너무나도 쉽게 내 범죄를 자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었다. 가로등도 많이 없는 이 시골 바닥 새벽 4시 반이라는 암흑 속에서 나의 핸드폰 불빛만이 아주 휘황찬란하게 밖을 비춰주고 있다는 것을. 아예 처음부터 나는 나의 범죄를 여기 보세요-하고 자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처음부터 혼날 운명이었던 것이다. 저 멀리서 나를 비춰주는 또 다른 빛을 느끼지 못하였으니 말이다. 쭈그리고 앉아 작은 소쿠리에 어느 정도 쌓인 딸기를 바라보며 슬슬 됐겠지 생각하고 있던 그때.

 

누고!!!”

 

내 뒤에서 날카롭게 내 고막을 찔러오는 그 소리에, 나는 직감했다.

, 이제 끝이구나. 이건 좀 순화한 거고 정말 그때 그 당시에 내가 속으로 외쳤던 말은 이거였다. 좆됐다.

 

욕을 안 하는 사람도 긴박해지면 욕이 나오는구나. 나는 별로 깨닫지 않아도 될 것을 깨닫게 되었다.

 

 

 

*

 

 

 

아 할아버지!!! 내가 시킨 거라니까!!!”

시끄릅다!!!! 시킨 놈이나 시킨다고 하는 놈이나!!!”

아부지, 뱃속에 아가 묵고싶었다카네예... 그렇게 많이 딴 것도 아니고 한 번만 봐주이소...”

묵고 싶으믄 묵고 싶다 말을 하믄 되제!!! 내가 니한테 도둑질캐라 가르치드나!!!!!”

할아버지가 새벽에 순찰 돌 줄 알았으면 내가 할아버지한테 따 달라 켓겠지!!!”

이노무 가시나가!!!!”

아이고, 아버님 애 떨어져요..!”

 

아침 6. 온 가족이 (강제) 기상하여 거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

죄지은 자는 말 없이 무릎 꿇고 앉아있을 뿐이고, 나를 제외한 모두가 일어서서 아침부터 마음껏 성량을 뽐내고 계신다. 잠을 충분히 못 자서일까,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는 간절함 때문일까. 너무나도 도쿄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여기서 말 한마디 얹어봐야 저분들의 목소리에 묻혀서 그냥 불똥 튄 거 받아먹기만 하는 신세가 될 것이고. 그저 내 옆에서 같이 처량하게 놓여있는 딸기 소쿠리에 눈길을 주며 조용히 쓴웃음을 지었다. 뭐가 어찌 됐든...

나의 올해 연봉은 딸기값으로 다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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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미대학사

 

 

 

결국 우리는 안 될 사이죠.

 

아직은 겨울의 차가움을 머금고 있던 봄바람이 물러나고 조금씩 태양의 열기가 더해지는 5월의 어느 토요일.

 

고개를 끄덕거릴 정도로 흥겨운 재즈 음악이 울려 퍼지는 카페에서.

 

나는 당신에게 이별을 고했다.

 

결국은 내가 먼저 말하네요.”

 

덤덤히 이별을 고하는 오늘은 일 년에 단 한 번 있는. 내가 태어난 날이다.

 

 

*

 

 

에이준군, 오늘도 안 올 거야?”

가야지....”

 

잠이 아직 덜 깬 상태로 얼굴 옆에 핸드폰을 켜놓고 작게 웅얼거렸다.

잠버릇이 그렇게 심한 건 아니라고 자부했는데 눈 떠보니 이불이 침대 밑에 처량히 떨어져 있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도 더웠나 보다. 자신은 어릴 때부터 더위를 많이 탔기에 예상을 못 한 것은 아니었으나 슬슬 에어컨 청소를 해야 하나 속으로 중얼거렸다.

 

카와사키 선배가 너 언제 오냐고 닦달이셔. 너무 많이 쉬면 어깨 굳는다면서

으윽...지금 일어났어 씻고 바로 갈게!”

 

카와사키 선배는 지금 대학에서 같이 야구를 하고 있는 내 배터리 포수다,

첫 만남부터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다짜고짜 공을 던져보라 하고 몇 구 던지지도 않았는데 내 구질과 버릇에 대해 다 파악을 하셨을 정도로 이쪽에선 꽤 소문이 자자한 사람이다.

그 첫 만남이 지금도 꽤나 인상에 남는다.

데자뷰가 생각나는 일이어서 그랬나. 어느 누구랑 좀 닮은 면이 있어서 그랬나.

실없는 생각을 하며 느릿하게 칫솔질을 하다 거품을 퉤 하고 뱉었다.

생일로부터 며칠 지났지.

내 인생에서 그렇게 조용하고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간 생일은 처음이어서 그런지 그날이 내 생일이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냥 흘러가는 일상 중 하나였던 것 같다.

그 날이 토요일이었고, 월요일은 자체 공강으로 쉬었으니... 오늘이 나흘째네.

옷을 갈아입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가 이걸 왜 세고 있지.

 

 

*

 

 

늦어 사와무라

으악 죄송함다!”

 

학교 정문에서 친히 날 기다리고 있던 선배는 내가 정문 근처에 다다르자 평소의 그 서글서글한 미소를 띠며 내 목에 인정사정없이 헤드락을 걸었다.

 

요새 대학 야구 많이 좋아졌다? 선배한테 말도 없이 휴가도 얻을 수 있고, 아 나만 몰랐나?”

으아악! 잘못했슴다! 죽어요! 저 죽어요!”

뭘 이 정도로 죽어 안 죽어. 아무리 그래도 우리 팀 선발투수인데 이렇게 쉽게 죽으면 쓰나

 

선배는 정문에서 라커룸, 그리고 불펜에서 마운드까지 가는 내내 나에게 찰싹 달라붙어 쉴 새 없이 잔소리를 늘어놓으셨다. 솔직히 귀에서 피가 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진짜다.

 

충분히 쉰만큼 제대로 안 던지면 헤드락으로는 안 끝난다~”

엑 선배 너무함다...”

하루이치가 대신 변명 안 해줬으면 넌 오늘 마운드 못 올라왔어

하룻치 사랑해!!”

 

고개를 돌려 힘껏 소리치자 하룻치는 멋쩍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아이고! 우리 투수님 오늘 고생 많았어~”

하루 쉰 보람이 있네 집에 가서 푹 쉬어라 내일도 열심히 해야지!”

아하하 감사합니다!”

 

쉬었던 게 정말로 효과가 있었던 건지 오늘 연습경기는 우리 팀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선배들이 차례대로 내 등짝을 내리치며 한마디씩 덕담하는 것을 듣고 있자니 어느새 하나둘 사람들이 나가고 라커룸에는 얼얼해진 등짝에 눈물이 고인 나와 그런 내 등에 조심히 아이스팩을 올려주는 하룻치만 남았다.

 

...이겨서 진짜 다행이다

오늘 졌었으면 빨개진 등으로는 안 끝났을 거야

음믐므... 생존본능으로 일궈낸 값진 승리지

 

나의 중얼거림에 하룻치는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미소짓더니 이내 조금 낮은 목소리로 조심히 입을 열었다.

 

“...조금 진정은 됐어?”

 

동요하지 않으려 했으나 그 말 한마디에 몸은 이미 움찔, 하고 작게 떨렸다.

찰나 같은 적막이 라커룸을 메꿨으나 그 적막이 싫어서 억지로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은데

에이준군...”

 

내 생일날. 4년이라는 긴 연애에 스스로 마침표를 찍고 혼자 그 카페를 나온 날.

스스로 이겨내려 했지만, 집에 도착하자마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던 나는 결국, 이 순간 가장 믿을 만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술 한 방울 마시지 않은 깔끔한 맨정신으로 눈물 콧물 질질 짜며 열심히도 웅얼거렸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사실 나도 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일상생활 할 수 있을까 같은 이런저런 걱정 많았었는데 의외로 괜찮은 것 같아

 

오늘 마운드에서도 집중 잘했고. .

 

무엇보다 그 사람은 나 같은 건 잊고 잘만 살고 있을 텐데 나 혼자 순정만화 주인공처럼 청승맞게 질질 짜고 있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더라

 

고등학교 2학년부터 대학교 2학년까지의 모든 순간에 그 사람이 함께했기에.

무엇을 기억하든 내 옆에는 항상 그 사람이 있었기에.

그런 사람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는데 내가 과연 버틸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얼마나 많이 던져봤던가. 하지만 그 수많은 고민들이 정말 무색하리만큼 자신은 잘만 지내고 있었다. 이별을 고한 그 당일 이후 내가 정말 그렇게 울고불고했던가 싶을 정도로 잘 자고 잘 씻고 아침에 조깅을 하기도 했다. 언젠가 길을 가다 무심코 귀에 들려오던 노래가사가 떠올랐다. 밥만 잘 먹더라. 딱 지금의 내 상황이구나 싶다.

 

그때는 순간 욱해서 나온 말인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로 마음이 식어서 그랬던 것 같아

 

참 웃기지. 좋아하는 것도 내가 먼저하고 고백도 내가 먼저 하고 사랑도 내가 더 많이 한 것 같은데. 식는 것도 내가 먼저 했다.

 

다 괜찮아. 오히려 후련한 마음도 있지. 그런데 하룻치

 

정말로 이렇게 끝난 거라면, 4년이라는 그 긴 시간 동안 나 혼자 연애했던 것만 같아서.

그 부분이 아직까지도 내 가슴을 쑤셔.

가슴 졸이며 두근거리고 수줍게 미소 짓던 그 순간순간들이 다 나 혼자만의 것이었나 싶어서.

그게 그렇게 겁이 나.

 

 

*

 

 

생일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여전히 일상은 잘만 돌아갔다. 카와사키 선배는 여전히 내 공을 받아주고 헤드락을 걸며 장난도 쳐주셨다. 내가 죽는다고 소리치면 하루이치가 와서 적절히 막아주었다.

교수님의 목소리를 ASMR 삼아 턱을 괸 채 졸기도 하고 동기들과 학식 가성비가 안 좋다고 궁시렁거리며 점심도 먹었다. 시간이 날 때면 집에 전화해서 가족들과 안부를 묻기도 하고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술 한잔 걸치기로 약속도 잡았다.

이렇게까지 잘 살아도 되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나름 잘 지내고 있었다.

적당히 마시려던 술자리는 누가 그런 불경한 소리를 내었냐며 서로 들이 부어주기 바빴고 모두가 그렇게 들이받은 술을 아낌없이 들이켜며 옛날 추억들을 떠들어댔다. 그땐 그랬지 라며 눈가를 적시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며 혀를 내두르는 녀석도 있었다. 나도 왁자지껄 떠들며 옛날얘기를 늘어놓기 바빴다. 모두와 함께 보낸 그 시절을 떠올리며 동시에 나와 그 사람만 알고 있는 그 시절도 떠올렸다.

술은 참 신기하지.

맨정신엔 그렇게 잊고 싶어 죽으려 했으면서 지금은 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미소가 지어진다. 지나간 일들은 다 아름답게 포장되어 추억이 된다던 어느 드라마 대사가 떠오른다. 내가 그 드라마를 정말 몰입하며 보긴 했었지만, 이렇게까지 공감하게 될 줄은 몰랐다.

 

 

*

 

 

정신줄 잘 붙잡고 똑바로 걸어!”

괜찮아 괜찮아! 집은 똑바로 간다니까!”

목소리 좀 줄여 바보야 지금이 몇 신줄 알아!”

카네마루군 그렇게 말하는 본인도 시끄러워

다들 도착하면 연락 돌리고!”

라져!”

오늘 즐거웠어 모두들 조심히 들어가~”

 

후끈후끈 올라오는 열기에 정신이 멍해졌다. 몇 병 마셨더라? 이렇게까지 고삐 풀고 마신 건 신입생 환영회 때 이후 처음인 것 같다. 전철은 막차가 끊기기 직전이었다. 역에 도착하면 이미 전철은 떠났을 것이다. 이럴 땐 집이 가까운 게 참 좋다니까. 속도 메스껍고 시야도 흔들거려 몇 걸음 걷다 전봇대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어쨌든 집까지 걸어갈 정신은 남아있었다. 내가 너보단 세지! 라는 남자들의 그 알량한 자존심은 하마터면 그 남자들을 네 발로 걷게 만들 뻔했다. 집 가면 바로 뻗어야겠다. 씻을 정신도 없을뿐더러 신발 벗자마자 쓰러질 것 같았다.

 

 

*

 

 

간신히 난간을 붙잡고 한 발짝, 한 발짝 느릿하게 계단을 올라갔다.

여기서 잘못 헛디뎠다간 후두부 박살 나서 즉사하겠지. 그렇게 멍청하게 죽고 싶진 않았다.

이제 두 계단만 더 오르면 다 올라왔을 쯤 오른쪽 주머니를 휘적이며 열쇠를 찾았다.

그리 어렵지 않게 열쇠를 손에 쥐고 복도를 따라 205호로 향하고 있었다.

오는 동안 찬바람을 맞아 심하진 않았지만, 아직 일렁거리는 시야 때문에 조금 비틀거리며 나아가다 203호쯤에서 걸음을 멈췄다.

 

나 진짜 많이 취했나 보네...”

 

헛것이 보일 정도로 들이부었나. 도대체 몇 병 마셨지?

 

“...선수가 몸 관리 안 해? 어디서 술을 그렇게 마셨어?”

와 말도 하네

 

꿈인가? 귀신인가? 너무 취하면 환각에 환청도 들을 수 있나? 마비된 뇌를 열심히 굴리고 있는데 그 헛것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다 터벅터벅 걸어와서는 슬며시 내 손을 잡았다.

손끝은 차가웠지만, 손바닥은 여전히 사람의 열기를 머금고 있었다.

 

한참 고민하다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서 와 봤더니 집주인은 집에 없고

“...”

이 시간쯤이면 와야 하는데 코빼기도 안 보이길래 큰맘 먹고 전화했더니 받지도 않고

“...”

그냥 가려다가 쓸데없는 오기가 생겨서 올 때까지 계속 기다렸더니

“...”

집주인은 술에 쩔어서 앞에 있는 게 사람인지 헛것인지 구분도 못 하네

진짜 미유키에요?”

가짜 미유키도 있나?”

 

술이 확 깬다는 게 이런 뜻이구나.

일렁거리던 시야가 순식간에 선명해지고 마비되었던 뇌가 언제 그랬냐는 듯 빠르게도 돌아간다. 이 사람이 왜 여기 있어? 연애할 때도 보기 힘들었던 잔잔한 미소를 띠며 날 바라보는 눈을 멍하게 바라봤다.

 

당신이 여길 왜 와요? 미쳤어요?”

보고 싶어서

?”

 

나는 술에 취해도 맨정신은 놓지 않았는데 이 사람은 맨정신에도 미쳤구나.

이봐요 우리 헤어졌어요. 아 나 혼자 연애했던 거라 본인한텐 헤어진 게 아닌가?

 

당신 우리가 헤어진 거 몰라요? 좋게 헤어진 것도 아닌데 당신 낯짝은 얼마나 강철이길래 이렇게 당당하게 내 집 앞에서 날 기다려요? 완전 꽐라였는데 술이 확 깨네?”

난 그때 대답 안 했어

뭐요?”

그때 카페에서. 너 혼자 말하고 가버렸잖아. 나도 그때 할 말 있었는데 그날 이후로 내 연락 안 받고 찾아가고 싶었는데 바빠서 못 갔어

그래서 억울해서 찾아왔어요?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싶어서?”

왜 그렇게 날이 서 있어

그럼 내가 아이고 귀한 분께서 이리 누추한 곳엔 어쩐 일로 하면서 현관이라도 열어줘야 해요? 내가 그때 무슨 말 했는지 기억하긴 해요?”

너 혼자 연애하는 것 같다며. 네가 내 인생에 장애물 같고 걸리적거리면 차라리 빨리 치워버리지 왜 자꾸 옆에 놔두냐며. 결국은 네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하게 한다며.”

 

내 눈을 똑바로 보며 한 톨도 틀리지 않고 내가 뱉은 그 가시 박힌 말들을 다 되돌려주는 당신을 쳐다보면서, 내 취기 때문인지 아니면 당신 때문에 올라오는 분노인지 분간도 안 가는 이 와중에도.

당신의 그 목소리가, 그 눈빛이, 날 잡고 있는 당신 손의 그 온기가.

아직도 좋다고 느껴지는 게 너무 싫어.

 

진짜 나도 미쳤구나...”

 

그렇게 혼자 잘 먹고 잘산다며 떵떵거렸는데, 이별 그거 별거 아니네 하며 훌훌 털어버린 줄 알았는데, 당신 같은 거 금방 잊고 이제 눈곱만큼의 마음도 없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화나고 서럽고 억울해서 눈물이 나는데도. 내 앞에 당신이 서 있는 게 왜 이렇게 좋아? 왜 나는 잡힌 손을 뿌리치지 못해? 진짜 못났다 사와무라 에이준.

 

내가 미안해

 

아랫입술을 깨물며 북받치는 숨을 겨우 끅끅거리는 내 얼굴을 참 다정하게도 매만지는 당신을. 굳은살이 박힌 투박한 손가락으로 세심하게도 눈물 맺힌 내 눈가를 쓸어주는 당신을.

왜 나는 뿌리치지 못해?

 

바쁘다고 힘들다고 변명 안 할게. 미안해. 너에 대한 마음은 하나도 안 식었어.”

거짓말

미안해. 더 표현하지 못해서. 그땐 너 혼자 그렇게까지 생각했다는 것에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했어. 혼자 그렇게 앓고 있는 줄 몰랐어

거짓말

네가 나에 대한 마음이 식었다 하더라도, 뒤늦게나마 말하고 싶었어.”

 

조심히 날 감싸는 그 팔을, 내 가슴으로 전해지는 그 심장 박동을.

왜 나는 뿌리치지 못해.

 

좋아해, 미안해 사와무라

진짜 싫어 미유키 카즈야...”

 

이렇게까지 약한 모습을 보이며 내 어깨에 고개를 묻는 이 사람을.

참다 참다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지 못하게 된 이 사람을.

나는 뿌리치지 못해.

 

, 그래도 나름, 잘 먹고, 잘살고 있었는데

당신 같은 거, 금방 잊었는데

, 왜 갑자기 나타나서, 날 또 흔들리게, 해요

 

북받치는 숨을 끅끅거리면서도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뱉으면서.

나는 결국 당신의 너른 등에 내 손을 올렸다.

 

, 내가 힘들었다고, 깨닫게 만들어요...”

 

나는 결국

당신 없인 잘 먹고 잘살 수 없었다.

 

내가 미안해

 

내 인생에서 가장 조용한 생일에 내 인생 첫 연애가 막을 내렸었다.

그런 줄 알았는데

 

이제 그만 울어. 내일 눈 퉁퉁 부어서 못난이 되겠네

미유키 카즈야 진짜 미워...”

그렇게 미운 미유키 카즈야가 생일 다시 보내자고 말할 건데 거절할 거야?”

 

그런 줄 알았는데

2막이 있었나보다.

 

너무 좋아서 더 미워...밉다고!”

 

미워. 다 미워.

근데 그만큼 좋아. 너무 좋아.

 

네 눈물 콧물로 옷이 더러워져서 집에 못 가겠다고 찡찡대는 이 능글맞은 너구리를 못 이기는 척 집에 데려오고 오랜만에 익숙한 품에 안겨 익숙한 체향을 맡으며 눈을 감고.

늦은 오후에 눈을 떠 당신이 만든 뜨신 국물을 한 숟갈 퍼먹으며.

 

그렇게 내 인생 처음으로 늦은 생일날을 보냈다.

 

그렇게 또 하나의 추억이 포장되었다.

 

 

 

 

 

 

 

 

*이틀이나 늦어버렸다 젠장...쿠라모치생일에 사와무라생일 연성을 올리다니..ㅠㅠ 

생일은 챙기고 싶어서 백만년만에 다시 글을 써봅니다 쓰면서도 내 머리대로 손이 움직여주지 않아서 슬프더군요

프로미대학사로 보고 싶었는데 연성문장 진단받으니 너무나도 새드랑 어울리는거 나오길래... 아무리 그래도 생일인데 새드는 그렇잖아요 (개인적 의견) 그래서 결말은 어떻게든 해피로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이제 쿠라모치 생일 챙기러 가볼게요(헬쓱)

 

생일 축하해 태양을 닮은 아이야. 언제나 널 축복해.

Posted by 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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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늦었지만 미유키 생일기념
*2세 설정 있습니다 (BL)
*미유사와 둘은 성인입니다
*진단메이커로 받은 주제 (맨 마지막 문장이 주제였습니다)






차가운 바람이 이따금 창문을 때리지만 동시에  따스한 햇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피부에 온기를 느끼게 해 주었다.

"좋은 아침이야. 잘 잤어?"

폭신한 애기침대에 누워 하늘에 떠있는 해처럼 따스하게 웃어주는 아이와 눈을 맞추며. 늦은 아침인사를 건넸다.

"에이준 아빠는 운동하러 갔나봐. 우리 공주님 웃고 있는거보니 에이준아빠가 밥 먹여주고 갔나 보구나?"

내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베시시 미소짓는 아이를 조심히 안아올려 품에 감싸안았다. 비시즌인 주말의 오전 10시. 너무나도 평온하기 그지 없었다.

"모처럼 가족 모두 쉬는 날인데 뭐 하면서 보낼까. 우리 공주님 데리고 드라이브 갈까?"

거실 창문을 통해 밖을 내려다보며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시즌 기간에는 거의 얼굴을 보여줄 수 없어 혹여나 날 잊었을까 걱정했었는데 우리 공주님은 비시즌이 시작되고 집으로 돌아온 첫날만 낯설어하고 그 뒤부터는 날 아빠로 인식해준 것 같다. 정말 누굴 닮았는지 확연히 보이는 친화력이라고 생각했다.

한손으로는 아이를 품에 앉고 한손으로는 향긋한 허브티를 마시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따뜻한 것이 입에서 가슴까지 천천히 퍼지는 것을 느끼니 저절로 몸의 긴장이 풀려 느슨해졌다.

"에이준아빠 오면 오랜만에 나가노에 가자고 해볼까? 할머니, 할아버지도 우리 공주님 보고 싶어하실거야."

아이는 내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무어라 옹알거리며 두손을 들어 나를 향해 허우적댔다. 그 작디작은 손에 손가락을 건네니 꼬옥 붙잡아 화답해주었다. 허브티와는 다른 따스함이 손을 타고 서서히 퍼져갔다. 조용하고 평온한 따스함이 집안을 서서히 메워가는 것을 느낄 쯤, 경쾌한 도어락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공주님~ 아빠 왔어요~"
"애 자고 있었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큰소리로 들어와?"

말은 빈정거리며 내뱉었지만 몸은 정반대로 미소지으며 현관으로 향했다.

"앗 카즈 드디어 깼슴까! 정말 변함없이 늦잠꾸러기라 큰일임다!"
"비시즌인데 좀 늦잠자면 어때. 너야말로 변함없이 성실하네. 그 케이크는 뭐야?"

성실하다고 칭찬하면 금방 우쭐해져서 자기자랑을 몇시간이고 조잘댈 녀석이기에 미리 입을 막을 겸 그의 손에 들려있는 예쁘게 포장된 케이크로 눈길을 돌려 물었다. 그라면 아무 생각없이 맛있어 보여서 사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뭔소림까 거참! 오늘 당신 생일이니까 러닝 나간 김에 사온거라구요!"
"엥?"

너무 뜻밖의 대답이라 순간 얼이 빠져 품속의 아이가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빨고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에이준이 먼저 알아채고는 쪽쪽이를 물리기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내 생일이었어?"
"...정말 몇년이 지나도 자기 자신한테 무관심한건 여전하네요. 공주때문에 큰소리로 화도 못내고. 어휴"

전매특허인 고양이눈을 하고 날카롭게 쏘아보더니 비교적 작은 목소리로 핀잔을 주며 부엌식탁에 커팅한 케이크를 올려놓았다. 말차를 넣은 달콤쌉싸름한 케이크였다.

"당신 단거 별로 안 좋아하니까 며칠 전에 가게에다 미리 주문예약까지 해놓은검다. 최대한 안 달고 말차 팍팍 넣어달라구요. 러닝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만들어진거니까 지금이 제일 맛있을검다. 애 주고 얼른 먹으십쇼!"

어느새 씻고 옷까지 갈아입은 에이준이 내 옆으로 와서 팔을 벌렸다. 얼떨떨한 채 아이를 넘겨주고 내 앞에 놓인 말차케이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안먹으면 일주일동안 대화 안할검다. 생일축하 노래 불러줄테니까 촛불도 끄십쇼. 아차 자르기 전에 불붙일걸"
"순서 엉망진창이네"
"음믐므! 축하해주는데 의미를 두십쇼!"

뒤늦게 초를 케이크에 꽂고는 불을 붙였다. 맞은편에 앉은 에이준이 아이의 손을 잡고 박수를 치며 생일축하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ㅡ사랑하는 카즈야, 생일 축하합니다~"

가만히 맞은편의 에이준과 아이를 바라보다 마지막 구절에 맞추어 숨을 내쉬어 불을 껐다.

"와아 카즈야 아빠 생일 축하해요~"

에이준이 가성으로 아이의 목소리를 대변하듯 축하해주며 박수를 쳐줬다.

"고마워. 잘먹을게"

초를 치우고 포크로 한입 떠 먹었다.
포근한 케이크를 씹을수록 말차의 쌉싸름함이 퍼져 달콤함이 과해지지 않도록 막아주었다.

"오, 맛있어"
"흠! 카즈야 입맛정도야 이제 제 손바닥 안이라구요!"
"그래그래. 고마워"
"너무 성의없게 말하는거 아님까?"

볼에 바람을 잔뜩 불어넣고는 아이처럼 노려보는 네가 너무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또 오해하기전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에이준, 진짜야. 나 너무 행복해"

야구가 전부였던 나의 인생에 네가 나타나, 야구 외의 많은 것을 알게 해주고 싸우고 울고 웃으며 같이 나아가 어느새 너와 나 사이에 아이가 생기고 이렇게 평온하고 행복한 가정이 생겼는데.
어떻게 행복하지 않겠어?

"항상 느끼지만 난 너 없으면 못 살거야"
"얼씨구. 천상천하 유아독존 미유키 카즈야 어디갔슴까?"
"오, 나이먹더니 이제 그런 말도 쓸 줄 아네?"
"악 이거봐! 또!"
"핫핫핫"

진짜야. 네가 없던 생활은 이제 잘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니까. 이렇게 잔잔하고 소박하지만 충분히 따뜻한 행복은 네가 만들어 준거니까.

고마워, 눈물이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네.
Posted by 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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